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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48 호 | 기사입력 [2024-09-24] | 작성자 : 강서구보

<강서칼럼>사라진 가을 풍경(홍화자/수필가)

계절이 바뀐 산과 들에 가을색이 짙어진다. ‘이야기할머니수업을 하는 유치원에 평상시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앞 시간 수업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잠시 복도를 서성거리는 여유를 누렸다. 평소에 예사로 지나쳤던 복도 끝에 걸려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 속 초가집 지붕 위에 보름달을 닮은 박덩이가 덩실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낯익은 옛날 농촌의 가을풍경이다. 요즘은 농가에서도 잘 찾아볼 수 없는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 추억이다.

옛 농촌에서는 봄이면 집집마다 박을 심어 한해 쓸 그릇을 마련하였다. 바가지로 사용하는 박도 곡식과 함께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중요한 농사였다.

보름달을 빼 닮은 박이 열린 초가집 풍경의 그림 앞에서 나는 반세기 훨씬 너머의 가을로 소환되었다.

된서리가 내리기 전쯤이었다. 아버지는 지붕 위에 올라가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잘 영근 박덩이들을 따 내렸다. 할아버지의 능숙한 톱질 솜씨에 두 쪽으로 잘린 박은 옆집에 사는 쌍둥이 아재처럼 (동네사람 아무도 누가 형인지 아우인지 모를 정도로 똑같이 생겼음) 똑 같았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잘 삶아진 박을 꺼내어 속을 긁어내면 맛있는 박나물이 되었다. 별다른 양념 없이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간간하게 무쳐낸 박속의 맛은 일품이었다.

속을 파내도 박이 그냥 바가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박의 겉껍질을 모두 벗겨내야만 한다. 겉껍질을 모두 꼼꼼하게 모두 벗겨내는 일도 세밀한 작업이다. 말끔하게 껍질을 손질한 박들을 물에 헹구어 선선한 반그늘에 하루나 이틀쯤 바짝 말려야 비로소 예쁜 바가지로 탄생한다.

큰 박은 커다란 바가지가 되어 큰 그릇으로 쓰이고 작은 박들은 종그래기(작은 바가지)로 쓰였다. 모내기나 벼베기 철, 일꾼들이 점심이나 참을 먹을 때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박으로 만든 바가지는 뜨거운 국이나 밥을 담아도 열이 전달되지 않아 일꾼들에게 음식을 돌릴 때 어떤 그릇보다 편리했다.

해마다 봄이면 박씨를 심었고 가을이면 박바가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바가지는 온가족이 거들고 참여하여 만든 자급자족의 결과물이었다. 옹기나 질그릇, 놋그릇과 무쇠솥들은 단단하여 오래 쓸 수 있지만 값이 비싸고 무거웠다. 그런 그릇들에 비해 고급지지는 않지만 자급자족한 박바가지는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쓰임새가 다양했다. 가벼워서 들에서 쓰는 그릇으로도 제격이었다.

현대 문명의 핵심이 된 플라스틱의 발명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축복으로 다가왔다. 만능에 가까운 다양한 형태에 값도 싸고 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발전의 달디 단 열매를 선사했다. 플라스틱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물 쓰듯 써대는 1회용 제품들은 지구촌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어 간다.

요즘 생선이나 천일염에도 미세 플라스틱이 들어 있어 인체에 축적된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바다에 사는 거북이의 코에 꽂혀있던 빨대처럼 썩지도, 배출도 되지도 않는다는 플라스틱은 없어서도 안 될 필요악의 존재이다. 부담 없이 쓰고 버린 것들이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모양새다.

지금은 농촌 어디에도 박을 타서 바가지를 만들어 쓰는 집은 없다. 물론 초가지붕도 옛날 이야기다. 너도나도 친환경을 외치지만 편리한 플라스틱의 단맛에 길들여진 우리는 이제 그에 상응하는 쓴맛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고앙고앙나락을 타작하는 기계 소리가 들리는 논둑길을 어머니는 밥 광주리를 이고 저만치 가고 있다. 뒤에 반찬 광주리를 인 고모가 따른다. 달그락 달그락 가벼운 소리가 나는 종그래기 꿰미를 메고 팔랑팔랑 해찰을 떨며 단발머리 아이가 따라 가고 있다. 파란 하늘을 빨간 고추잠자리 떼가 가을바람 타고 너울너울 유영을 한다.

그림 속 초가지붕 위에 열린 커다란 박덩이가 보일 듯 말 듯 보내는 미소를 본다. 오늘 아이들에게 들려 줄 옛날이야기는 보름달을 닮은 초가지붕 위의 박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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